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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관리/정신, 뇌

소중했던 기억이 희미해지는 이유, 뇌는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by thinkpragmatic 2025.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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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이 제법 쌀쌀해진 깊은 밤, 사진첩을 보다가 문득 생각에 잠깁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나의 모습. 분명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이었음이 틀림없는데, 그때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이나 공기의 냄새, 심지어 내가 왜 저렇게 웃고 있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합니다.

 

가을밤, 따뜻한 조명 아래 사진첩을 바라보는 사람


분명 내 인생의 한 조각이고 소중했던 추억인데, 왜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이토록 무심하게 흐릿한 윤곽만 남기는 걸까요? 마치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는 결코 우리의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은, 우리의 뇌가 생존하고 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선택한 지극히 자연스럽고 효율적인 방식입니다.

 

 

뇌의 원칙 1 -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진다 (기억의 쇠퇴와 간섭)

우리의 기억은 뇌 속에 난 작은 '오솔길'과 같습니다.

 

1. 기억의 쇠퇴 (Decay Theory)

어떤 기억이 처음 생겨나면, 뇌의 신경세포(뉴런)들 사이에 새로운 연결 길, 즉 시냅스 통로가 만들어집니다. 이 길을 자주 다니면(기억을 자주 떠올리면) 길은 단단하고 넓어져 언제든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대로가 됩니다.

 

오래된 길 위로 잡초가 무성해지는 장면

 

하지만 그 길을 오랫동안 걷지 않고 내버려 두면, 잡초가 무성해지고 길이 희미해지다 결국에는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기억의 '쇠퇴'입니다. 자주 사용하지 않는 기억의 신경 경로는 자연스럽게 약해지고 사라지는 것이죠.

 

2. 기억의 간섭 (Interference Theory)

어제 먹은 점심은 기억나지 않아도, 1년 전 특별한 날에 먹었던 저녁 식사는 기억나는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우리의 뇌는 비슷한 정보들이 계속 들어오면 서로 간섭을 일으켜 기존의 기억을 밀어내거나 뒤섞어 버립니다.

 

비슷한 정보들이 서로 얽혀 흐릿해지는 기억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점심 식사는 어제의 점심, 그제의 점심과 서로 얽히고설켜 희미해지는 반면, 독특하고 새로운 경험은 다른 기억의 방해를 덜 받아 더 오래 남게 됩니다.

 

 

뇌의 원칙 2 - 기억은 재생이 아닌 '재구성'된다

우리는 기억을 비디오테이프처럼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그대로 '재생'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은 기억이 '재구성(Reconstruction)'된다고 말합니다.

 

기억의 조각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조립되는 장면



우리가 어떤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뇌는 흩어져 있는 기억의 파편들을 다시 불러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재조립합니다. 그런데 이 재조립 과정에서 현재의 감정, 새로운 경험, 달라진 가치관 등이 미세하게 섞여 들어갑니다.

그래서 어릴 땐 마냥 즐거웠던 기억이, 어른이 되어 떠올렸을 때 어딘가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기억은 박제된 화석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반영하며 계속해서 미묘하게 변형되고 편집되는 살아있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원래의 세세한 디테일들은 생략되거나 다른 정보로 대체되면서 기억이 흐릿해지는 것이죠.

 

 

뇌의 원칙 3 -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다 (뇌의 효율성)

만약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을 사진처럼 완벽하게 기억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뇌는 과부하에 걸려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지치기되는 신경망



우리의 뇌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정보를 '가지치기'합니다. 이를 '시냅스 가지치기(Synaptic Pruning)'라고 합니다. 뇌는 자주 사용하고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신경 연결(시냅스)은 강화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연결은 과감히 잘라내어 뇌를 최적화하고 효율적으로 만듭니다.

 

뇌 속에서 강렬한 감정(기쁨, 슬픔, 사랑)이 빛나는 장면


그렇다면 뇌는 무엇을 '중요하다'고 판단할까요? 바로 '감정'입니다. 강렬한 기쁨, 슬픔, 사랑, 공포 등 감정이 깊이 실린 기억에는 뇌가 마치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듯 특별한 표식을 남깁니다. 이 감정의 표식이 있는 기억들은 뇌가 쉽게 버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보관하게 되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릴 적 소풍날의 설렘은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무미건조했던 작년의 어느 평범한 날은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희미해지는 소중한 기억을 붙잡는 방법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지만, 소중한 기억이 사라지는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는 있습니다.

 

1. '기억의 오솔길' 자주 걷기

오래된 사진이나 일기장을 보며 그날의 기억을 친구나 가족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세요.

 

오래된 일기장과 사진을 보며 미소 짓는 사람

 

기억을 '인출'하는 행위 자체가 희미해진 길을 다시 단단하게 다지는 과정입니다.

 

2. 다양한 감각으로 기록하기

단순히 사진만 찍기보다, 그 순간의 감정을 몇 줄의 글로 남겨보세요. 여행지의 냄새를 담은 작은 기념품을 간직하거나, 그때 들었던 음악을 기록해두는 것도 좋습니다.

 

카메라, 노트, 이어폰, 향초 등 여러 감각적 도구

 

시각, 청각, 후각 등 다양한 감각과 연결된 기억은 훨씬 더 오래, 그리고 선명하게 남습니다.

 

3. '현재'를 온전히 느끼기

미래에 남길 선명한 기억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두고 노을을 바라보는 사람

 

스마트폰 화면 대신 눈앞의 풍경과 사람에게 집중하고, 오감을 열어 현재를 만끽하세요.

 

 

결론

과거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은 기억력의 쇠퇴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뇌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밤하늘 아래 추억의 길을 걷는 사람


어쩌면 망각은, 우리가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나갈 빈 공간을 마련해주는 뇌의 배려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붙잡을 순 없지만, 진정 소중한 기억은 '감정'이라는 짙은 잉크로 우리 마음속에 새겨져, 흐릿해질지언정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밤, 당신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가장 소중한 기억의 오솔길을 한번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가을의 달빛 아래, 미소 지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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